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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피디오 키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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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피디오 키리노는 필리핀의 정치인으로, 1890년 일로코스 수르 주 비간에서 태어났다. 필리핀 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19년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상원의원, 재무 장관, 내무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46년에는 독립 후 첫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제6대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기간 중에는 경제 재건과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나, 후크발라합의 공산주의 운동, 내각의 부패 등의 문제에 직면했다.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필리핀군을 파병했으며, 일본 전범을 사면하는 등 대외 정책을 펼쳤다. 1953년 대선에서 라몬 막사이사이에게 패배한 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195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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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피디오 키리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엘피디오 키리노 서명
출생 이름엘피디오 리베라 키리노
출생지비간, 일로코스수르주, 필리핀 총독부, 스페인령 동인도
사망지케손 시티, 필리핀
안장지마닐라 남부 공동묘지(1956–2016)
영웅 묘지(2016년 이후)
정당자유당(1946–1956)
다른 정당국민당(1919-1946)
자녀5명, 빅토리아 키리노 곤잘레스 포함
친척코리 키리노 (손녀)
직업변호사
모교필리핀 대학교(LL.B)
필리핀 대통령
순서6대
임기 시작1948년 4월 17일
임기 종료1953년 12월 30일
부통령라몬 아반세냐 (1948–1949; 사실상)
페르난도 로페스 (1949–1953)
전임자마누엘 로하스
후임자라몬 막사이사이
필리핀 부통령
순서2대
임기 시작1946년 5월 28일
임기 종료1948년 4월 17일
대통령마누엘 로하스
전임자세르히오 오스메냐
후임자페르난도 로페스
필리핀 외무부 장관
임기 시작1946년 9월 16일
임기 종료1950년 1월 6일
대통령마누엘 로하스
본인
전임자폐지
마지막 직위는 1899년 펠리페 부엔카미노 외무장관
후임자펠리노 네리
필리핀 재무부 장관
임기 시작1946년 5월 28일
임기 종료1946년 11월 24일
대통령마누엘 로하스
전임자하이메 에르난데스
후임자미겔 쿠아데르노
직책
임기 시작 51934년 7월 25일
임기 종료 51936년 2월 18일
대통령 5마누엘 L. 케손
전임자 5비센테 엔카르나시온
후임자 5안토니오 데 라스 알라스
내무부 장관
임기 시작 61935년
임기 종료 61938년
대통령 6마누엘 L. 케손
전임자 6테오필로 시손
후임자 6라파엘 알루난
필리핀 상원 임시 의장
대통령 7세르히오 오스메냐
임기 시작 71945년 7월 9일
임기 종료 71946년 5월 25일
전임자 7호세 아벨리노(대행)
후임자 7멜레시오 아란츠
필리핀 상원 의원
임기 시작 81945년 7월 9일
임기 종료 81946년 5월 28일
임기 시작 91925년
임기 종료 91935년 11월 15일
동료 9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 (1925–1928)
멜레시오 아란츠 (1928–1935)
전임자 9산티아고 포나시에르
후임자 9직위 폐지
선거구 9제1상원 선거구
하원 의원
선거구 10일로코스수르주 제1선거구
임기 시작 101919년
임기 종료 101922년
전임자 10알베르토 레예스
후임자 10비센테 싱손 파블로

2. 생애

엘피디오 키리노는 1890년 11월 16일 루손섬 북서부 남일로코스주 비간에서 태어났다. 비간과 마닐라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15년 필리핀 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1919년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이후 1925년부터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재무 장관, 내무 장관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1934년에는 마누엘 케손이 이끄는 필리핀 독립 사절단의 일원으로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타이딩스-맥더피 법 통과에 기여했다. 이 법은 필리핀 독립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독립은 지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점령 하의 마닐라 전투에서 아내와 세 자녀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공직에 복귀하여 상원 임시 의장을 지냈고, 1946년 필리핀 제3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 장관(외무 장관)을 겸임했다. 1948년 로하스 대통령의 서거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정치 입문

1890년 11월 16일, 루손섬 북서부 일로코스 수르주 비간의 지방 교도소에서 마리아노 키리노 이 케브랄과 그레고리아 리베라 이 멘도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중국계 혼혈 후손이다.[2][3] 유년 시절의 일부를 라우니온주 아링가이에서 보냈다.

비간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마닐라로 이주하여 토지국과 마닐라 경찰에서 근무했다. 1911년 마닐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필리핀 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여 1915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19년 일로코스 수르의 제1 선거구 대표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1922년까지 활동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25년에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했다. 이 기간 동안 케손 대통령 행정부에서 재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4년, 마누엘 케손이 이끄는 필리핀 독립 사절단의 일원으로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미국 의회에서 타이딩스-맥더피 법 통과를 위해 노력했다. 이 법은 1945년까지 필리핀의 독립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법안이었다. 1935년에는 새롭게 수립될 필리핀 연방의 1935년 필리핀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헌법 제정 회의에도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이 일본에 점령당했을 때, 마닐라 전투 과정에서 아내 알리시아와 다섯 자녀 중 세 명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 키리노는 공직 활동을 재개하여 상원 임시 의장을 역임했다. 1946년 필리핀 제3공화국 수립 후 첫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 장관(외무 장관)직을 겸임했다.

2. 2. 의정 활동 및 독립 운동

필리핀 대학교 법과대학을 1915년 졸업하고 법조계에 진입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19년 필리핀 하원의 일로코스 수르 제1선거구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한 임기(1919년~1922년)를 역임했다.

1925년에는 필리핀 상원의 제1 선거구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31년 재선되어 단원제 필리핀 국민의회가 설립되기 전인 1935년까지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마누엘 케손 대통령 내각에서 재무 장관과 내무 장관을 역임했다.

1934년, 키리노는 마누엘 케손이 이끄는 필리핀 독립 사절단의 일원으로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이 사절단은 미국 의회에서 타이딩스-맥더피 법(필리핀 독립법)의 통과를 목표로 했으며, 성공적으로 법안 통과를 이끌어냈다. 이 법은 1945년까지 필리핀의 독립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35년에는 새롭게 설립된 필리핀 연방의 1935년 필리핀 헌법을 제정하는 헌법 제정 회의에도 참여했다.

1941년 상원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실제 의정 활동은 1945년 이후에 가능했다. 전쟁이 끝난 후 키리노는 공직 활동을 재개하여 상원 임시 의장을 맡기도 했다.

1946년 4월 총선에서 키리노는 독립 제3 공화국의 첫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직과 함께 국무 장관(외무 장관)직을 겸임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가족의 비극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인 1934년, 키리노는 마누엘 케손이 이끄는 필리핀 독립 사절단의 일원으로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미국 의회에서 타이딩스-맥더피 법 통과를 위해 노력했다.[1] 이 법은 필리핀 독립의 법적 근거가 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실제 독립은 1946년에 이루어졌다.

전쟁 중 키리노는 큰 개인적 비극을 겪었다. 1945년 마닐라 전투 당시, 그의 아내 알리시아 시키아와 다섯 자녀 중 세 명(아들 아르만도, 딸 노르마, 딸 페 앤젤라)이 집에서 피신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22][38][36] 당시 키리노의 아내와 딸들은 길을 건너려다 일본군의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계속되는 총격 위험 때문에 시신을 바로 수습하지 못하고 길거리에 방치된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전해진다.[40] 키리노 본인도 훗날 일본인 전범 석방에 관한 공식 대통령부 성명에서 이 비극적인 사건을 직접 언급했으며, 이는 필리핀 정부의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다.[39] 또한, 그의 동생 한 명도 전쟁 중 일본군에게 처형(참수되었다는 설도 있음)당하는 아픔을 겪었다.[38]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언론인 다카야마 마사유키 등 일부는 키리노 가족이 일본군이 아닌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41][42]

이러한 비극을 겪었음에도 키리노는 전후 공직 활동을 재개하여 상원 임시 의장을 맡았고, 1946년에는 독립 필리핀의 첫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 장관을 겸임했다.

2. 4. 부통령 시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방 정부가 1945년 재건되자, 당시 상원의원이던 마누엘 로하스, 키리노와 그들의 동맹 세력은 대통령, 부통령, 국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조기 전국 선거를 요구했다. 1945년 12월, 미국 의회 하원 섬무위원회는 1946년 4월 30일까지 선거일을 정하는 공동 결의안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세르히오 오스메냐 대통령은 필리핀 의회를 3일간의 특별 회기에 소집했다. 의회는 1946년 4월 23일을 선거일로 정하는 연방 법률 제725호를 제정했으며, 이 법은 1946년 1월 5일 오스메냐 대통령의 서명을 받았다.

키리노는 상원 의장 마누엘 로하스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1946년 4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키리노는 필리핀 연방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부통령이 되었으며, 필리핀 제3 공화국의 첫 부통령이 되었다. 부통령으로서 키리노는 외무부 장관직을 겸임했다.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은 1948년 그의 전임자 마누엘 로하스 장례식에서 관 옆에서 울고 있다


1948년 4월, 재임 중이던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사망하자 키리노는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3. 제6대 대통령

1948년 4월 17일,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재임 중 사망하자 부통령이었던 키리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듬해인 1949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키리노는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국민당호세 라우렐을 꺾고 당선되었다.[10] 키리노는 마닐라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아내를 잃었기 때문에, 그의 딸 빅토리아가 영부인 역할을 맡았다.

키리노 정권 6년 동안 필리핀은 눈부신 전후 복구와 경제 성장을 경험했으며,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도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농촌 지역의 토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정부 내 부패뇌물 수수 문제가 심각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루손섬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무장 단체 후크발라합의 존재는 정권에 큰 부담이었다. 1948년 후크발라합 지도자 루이스 타루크와의 협상이 결렬된 이후, 이들은 공개적으로 정부 타도를 외치며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1950년 한반도에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키리노 정부는 유엔의 요청에 따라 참전을 결정하고 약 7,450명의 필리핀군 병력을 필리핀 원정군(PEFTOK)으로 파병했다.

3. 1. 국내 정책

1948년 4월 17일,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재임 중 사망하자 부통령이었던 엘피디오 키리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듬해 열린 선거에서 키리노는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국민당호세 라우렐을 누르고 당선되었다.[10] 키리노는 이미 아내를 잃었기 때문에 딸 빅토리아가 영부인 역할을 수행했다.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이 마닐라의 독립 광장(현재 키리노 독립 광장)에서 필리핀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를 위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키리노 정권은 여러 국내 문제에 직면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루손섬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후크발라합의 존재였다. 본래 항일 게릴라였던 이 단체는 점차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게 되었고, 1948년 지도자 루이스 타루크와 정부 간 협상이 결렬되면서 공개적으로 정부 타도를 외치며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키리노 정권 6년 동안 필리핀은 눈에 띄는 전후 복구와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미국으로부터의 경제 지원도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농촌 지역의 토지 문제와 같은 사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정부 내 부패뇌물 수수 문제 또한 심각한 비판에 직면했다.

한편, 1950년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키리노 정부는 유엔의 요청에 따라 참전을 결정하고, 약 7,450명의 필리핀군 병력을 필리핀 원정군(PEFTOK)으로 파병했다.

3. 1. 1. 경제 재건과 사회 개혁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재임 중 사망함에 따라 부통령이었던 엘피디오 키리노는 1948년 4월 17일 대통령직을 승계했다.[10] 이듬해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국민당호세 라우렐을 누르고 정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키리노는 대통령 취임 후 국가의 경제 재건과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신뢰 회복이라는 두 가지 주요 목표를 설정했다.

경제 재건을 위해 키리노 행정부는 여러 기구를 설립했다. 빈곤층 지원을 위한 대통령 사회 개선 위원회(PACSA), 노동 문제 자문을 위한 노동 경영 자문 위원회, 농민의 작물 판매 지원 및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농업 신용 협동조합 금융 관리국(ACCFA), 농촌 지역 금융 지원을 위한 필리핀 농촌 은행 등이 그것이다.

사회 개혁 측면에서는 일반 대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국민의 경제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시작했다.[6] 키리노는 마닐라의 빈민가와 낙후 지역을 직접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은 7개 항목의 사회 보장 프로그램을 공식 발표했다:[6]

  • 실업 보험
  • 노령 보험
  • 사고 및 영구 장애 보험
  • 건강 보험
  • 출산 보험
  • 국가 구호
  • 노동 기회


또한 사회 보장 위원회를 설립하고 사회 복지 위원 아순시온 페레즈를 위원장으로 임명했으며,[6] PACSA를 통해 불우한 시민들에게 구호, 대출, 지원을 제공했다. 이러한 정책은 국민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6]

키리노 정권 6년 동안 필리핀 경제는 주목할 만한 전후 복구와 성장을 이루었으며, 미국으로부터의 경제 원조도 증가했다. 주요 경제 지표는 다음과 같다.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 재임 기간 필리핀 경제 (1948–1953)
인구
1948약 1,923만 명
국내총생산 (1985년 불변가격 기준)
1948996.28억필리핀 페소
19531460.6999999999998억필리핀 페소
성장률 (1948–53)9.32 %
1인당 소득 (1985년 불변가격 기준)
19485,180 PHP
19537,596 PHP
총 수출액
1948359.21억필리핀 페소
1953344.32000000000005억필리핀 페소
환율
1 USD = 2 PHP
1 PHP = 0.5 USD
출처: [https://web.archive.org/web/20110714131730/http://filipinopresidency.multiply.com/photos/album/26#photo=13 필리핀 대통령 프로젝트]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키리노 정권은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부유한 지주들의 농지 과점과 같은 근본적인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으며, 정부 내 부패와 뇌물 수수 문제도 심각했다. 또한, 과거 루손섬의 항일 게릴라였으나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하게 된 후크발라합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회 불안 요인이 되었다. 1948년 후크발라합 지도자 루이스 타루크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타루크는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자임을 선언하고 정부 타도를 주장하며 갈등이 심화되었다.

3. 1. 2. 후크발라합 문제

키리노 행정부는 공산주의 성향의 후크발라합( Hukbalahaptgl ) 운동이라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6] 후크발라합은 '일본군에 맞선 국민군'( Hukbong Bayan Laban sa mga Hapontgl )의 약자로, 원래 루손 섬에서 활동하던 항일 게릴라 부대였으나 점차 공산주의자들이 지도부를 장악해 나갔다. 그 구성원들은 일반적으로 '훅스'( Hukseng )로 불렸다.

1948년, 키리노 대통령과 후크발라합 사령관 루이스 타루크 사이의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후 타루크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선언하며 정부 전복을 주장했다. 같은 해 8월 15일 사면 기한이 만료되었을 때, 정부는 후크발라합 측이 키리노-타루크 협정 조건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타루크는 국회에 진출하여 소급 급여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닐라에서 비밀리에 도주했으며, 많은 추종자들은 사면 조건을 따르거나 무기를 반납하지 않았다. 후크발라합 측에서는 정부가 합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반박했지만, 키리노 대통령은 이전의 우호적인 태도가 실패했다고 보고 다시 공격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여 반대 세력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강화하도록 명령했다.[6]

1951년 3월까지 공산주의 조직의 정식 등록 회원이 4만 명 이상으로 추정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자, 정부는 평화와 질서 회복을 위한 지속적인 캠페인을 전개했다.[6] 1951년 예산에는 항복한 후크발라합 대원들을 위한 토지 재정착 프로그램 자금이 포함되었다. 이 자금은 경제 개발단(EDCOR)을 통해 라나오 주 카파타간에 6500ha, 코타바토 주 불돈에 25000ha 규모의 정착지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각 정착지에는 안정적인 정착과 프로그램 성공을 위해 전직 군인과 그 가족들이 함께 이주했다. 실제로 정부가 제공한 새로운 삶의 기회를 포기하고 이탈한 후크발라합 출신 정착민은 10% 미만이었다.[6]

동시에 필리핀군의 효율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군 구조 개편이 이루어졌다.[6] 각 1,000명 규모의 대대 전투 팀(Battalion Combat Team, BCT) 26개가 창설되었다. 각 팀은 전반적인 작전 계획 조정을 제외하고는 상부 지휘체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필리핀 최초의 공수 부대, 정찰 레인저, 부대, 기병대와 같은 새로운 특수 부대들이 창설되어 상당한 작전 능력을 보여주었다.[6]

3. 1. 3. 토지 개혁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은 필리핀의 토지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1950년 10월 23일 행정 명령 제355호를 발동했다. 이 명령에 따라 기존의 국립 토지 정착 행정처(National Land Settlement Administration)는 토지 정착 개발 공사(Land Settlement Development Corporation, LASEDECO)로 대체되었다. 또한 LASEDECO는 농업 기계 장비 공사(Agricultural Machinery Equipment Corporation)와 쌀 및 옥수수 생산 행정처(Rice and Corn Production Administration)의 책임까지 인수하게 되었다.[11]

3. 2. 대외 정책

키리노 행정부는 외교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으며, 키리노 대통령의 지성과 교양은 외국의 정상들과 정치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미국, 유럽 국가, 동남아시아를 공식 방문하며 필리핀의 국제적 입지를 다졌다. 재임 기간 동안 자유 세계의 여러 국가들과 조약 및 협정을 체결했다. 1949년 7월에는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이, 1951년 1월에는 인도네시아수카르노 대통령이 필리핀을 방문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키리노 정권은 유엔의 요청에 부응하여 참전을 결정하고, 7,450여 명의 필리핀 군인을 필리핀 한국 파견군 (PEFTOK)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파병했다. 이는 냉전 시기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공동 대응의 일환이었다.

또한 1951년, 필리핀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 미국-필리핀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이후 미국의 아시아 외교 정책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집무실에서 필리핀 대통령 엘피디오 키리노로부터 지팡이를 선물로 받는 모습, 호아킨 엘리잘데 대사가 지켜보고 있다.


한편, 키리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가족을 잃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필리핀에 수감 중이던 일본인 전범들에 대한 사면을 단행했는데, 이는 미래 세대가 증오를 물려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국가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한 결정이었다.[13] 이 조치는 당시 필리핀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으나[13][14], 결과적으로 양국 간 화해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6]

3. 2. 1. 미국과의 관계 강화

키리노 대통령 재임 기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복구와 경제 성장, 그리고 미국으로부터의 경제 원조 증대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1950년, 미국 은행가 다니엘 W. 벨이 이끄는 벨 미션(Bell Mission)은 필리핀 경제 상황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제출했다.[6] 이 보고서는 필리핀 경제 및 사회 개혁을 위한 여러 제안을 담고 있었으며, 키리노 대통령은 미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고자 했다.[6] 이에 따라 1950년 11월, 키리노 대통령과 미국 정부를 대표한 윌리엄 채프먼 포스터는 벨 미션 보고서에 따른 필리핀의 법안 마련과 미국의 지원을 약속하는 협정을 체결했다.[6]

냉전이 심화되면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필리핀은 1951년 미국과 미국-필리핀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했다. 이 군사 동맹은 이후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외교 정책의 중요한 기반 중 하나가 되었다.

키리노 대통령은 외교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순방하며 필리핀의 국제적 입지를 다지고자 노력했다. 미국 방문 중에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 양국 관계를 논의하기도 했다.

키리노는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필리핀의 자주성을 강조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저는 미국이 이 나라의 위대한 건설자임을 인정하지만, 우리나라의 주권, 더 나아가 존엄성과 미래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12]라고 언급하며 미국과의 협력 속에서도 필리핀의 국익과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3. 2. 2. 한국 전쟁 참전

1950년 6월 25일, 북한대한민국을 침공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세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6] 유엔은 즉시 이 지역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나섰다. 당시 유엔 총회 의장이던 필리핀의 카를로스 로물로는 대한민국을 위한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인물 중 하나였다.[6]

로물로는 필리핀 정부를 대표하여, 유엔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필리핀 군사 파견단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로써 필리핀은 미국과 더불어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가장 먼저 제안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6]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은 필리핀의 참전을 결정하고 필요한 조치를 승인했다. 이에 따라 총 7,450여 명의 필리핀 군인이 필리핀 한국 파견군(Philippine Expeditionary Forces to Korea|PEFTOKeng)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파병되었다. 첫 파견 부대인 제10대대 전투단은 순수 자원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아수린 대령의 지휘 아래 한국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뛰어난 군사적 기술과 용맹함으로 빠르게 알려졌다.[6] 특히 전사한 호세 아르티아가 주니어 대위는 조국 밖에서의 자유를 위한 필리핀의 헌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게 되었다.[6] 이후 여러 필리핀 전투 부대들이 차례로 파견되어 첫 부대를 교체했으며, 이들은 전쟁을 종결시킨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규율, 끈기, 용기를 보여주며 활약했다.[6]

3. 2. 3. 일본과의 관계 개선

키리노제2차 세계 대전마닐라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아내와 세 자녀, 그리고 다른 가족 다섯 명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13] 이러한 개인적인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통령 재임 중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1953년 7월, 필리핀 사회에 반일 감정이 여전히 깊게 남아있던 상황에서, 키리노는 미국 볼티모어의 병상에서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필리핀에 수감 중이던 일본인 전범 105명 전원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하고 이들의 일본 귀국을 허용했다.[34] 이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특사권을 행사한 것이었다. 키리노는 이 결정에 대해 "나는 내 자녀와 국민들이 아직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물려받기를 원하지 않으며, 이는 국가의 영구적인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설명하며 미래 지향적인 관계 설정을 강조했다.[13]

당시 많은 이들은 키리노의 이러한 행동을 정치적 자살 행위로 간주할 정도로 파격적인 조치였다.[13] 필리핀의 유력 언론인 ''마닐라 불레틴''은 이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역사적인 제스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4] 사면 대상에는 전쟁 중 필리핀인들에게 살인, 강간 등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전범들도 포함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15], 키리노는 용서와 화해를 통한 관계 개선을 선택했다. 사면된 전범들은 1953년 12월까지 모두 석방되었다.[15] 이들은 미군이 운영하던 필리핀 전쟁 범죄 위원회나 필리핀 민사 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이들이었다.[15]

키리노의 전범 사면 결정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그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 따른 결단이라는 시각[35], 전범 수감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을 덜고 교착 상태에 빠진 일본과의 배상 협상을 타개하려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는 분석[36] 등이 있다. 일본 자유민주당 부총재를 지낸 고무라 마사히코는 훗날 키리노의 손자로부터 "어머니를 죽인 일본인을 왜 용서해야 하냐"는 자녀의 질문에 키리노가 "증오의 연쇄를 끊어야 한다"고 답했다는 일화를 전해 듣고, 일본 히비야 공원에 키리노의 현창비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다.[34]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일본의 언론인 다카야마 마사유키는 키리노가 당초 일본과의 배상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몬텐루파 수용소의 B·C급 일본인 전범 처형을 압박 카드로 사용하려 했으나, 존 포스터 덜레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질책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전원 사면을 결정한 것이 미담으로 포장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7]

키리노의 전범 사면은 결과적으로 필리핀과 일본 간의 화해를 촉진하고 양국 관계가 우호적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6] 하지만 이 결정은 당시 필리핀 국내 정치에는 부담으로 작용하여, 1953년 대통령 선거에서 키리노가 라몬 막사이사이에게 패배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34]

4. 만년

60대 중반의 키리노


1953년 7월, 필리핀 내에 반일 감정이 여전히 뿌리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키리노는 미국 볼티모어 병원에 입원 중일 때 라디오 녹화를 통해 일본인 전범 105명 전원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하고 일본으로의 귀국을 허가하였다.[34] 이 결정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키리노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따른 결단이라는 설,[35] 전범 수용에 따른 재정적 부담을 덜기 위함이었다는 설, 또는 당시 교착 상태에 빠진 일본과의 배상 협상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모험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36] 한편, 훗날 자유민주당 부총재를 지낸 고무라 마사히코는 2016년 필리핀 방문 당시 키리노의 손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했는데, 키리노는 가족을 살해한 일본인을 용서하는 이유를 묻는 자녀에게 "증오의 연쇄를 끝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34] 이러한 결정은 일본 히비야 공원에 키리노의 현창비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시각도 존재하는데, 언론인 다카야마 마사유키는 키리노가 처음에는 전범 처형을 통해 일본에 거액의 배상을 요구하려 했으나,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질책을 받고 계획이 틀어지자 어쩔 수 없이 전범들을 석방한 것이 미담으로 포장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7]

같은 해 11월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키리노는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도전하였으나, 라몬 막사이사이에게 큰 차이로 패배하였다. 일각에서는 일본인 전범 석방 결정이 선거 패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한다.[34] 선거 패배 후 키리노는 정계를 은퇴하고 퀘손 시에서 여생을 보냈다. 은퇴 후 그는 필리핀 "외교의 아버지"로 불리며 국가에 대한 봉사 정신을 인정받았다.

과거 마닐라 남부 묘지에 있던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의 묘지


1956년 2월 29일 저녁, 키리노는 회의 참석을 준비하던 중 심각한 심장마비를 일으켜 퀘손 시 노바리체스의 자택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라몬 막사이사이는 3월 1일부터 15일까지를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하고 전국 관공서에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18] 키리노의 유해는 말라카냥 궁전에 잠시 안치되었다가[19][20] 3월 5일 마닐라의 입법 건물에서 장례식이 거행된 후 마카티의 마닐라 남부 묘지에 안장되었다.[19][20]

리빙안 응 마가 베야니에 있는 엘피디오 키리노의 현재 묘지


그의 사망 60주기인 2016년 2월 29일, 키리노의 유해는 타기그에 위치한 리빙안 응 마가 베야니(영웅 묘지)의 특별 묘역으로 이장되어 재안장되었다.[21]

5. 평가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의 재임 기간에 대한 평가는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 성과와 국내 정치에서의 논란이 공존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카를로스 P. 로물로의 국제 연합 총회 의장 선출 지원이나 아시아 국가 간 협력을 모색한 바기오 회의 개최 등은 국제 무대에서 필리핀의 위상을 높인 성과로 평가된다.[6]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족벌주의와 부정부패 의혹으로 탄핵 위기를 맞기도 했으며,[6] 특히 1949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는 폭력과 부정행위로 인해 공정성 논란이 크게 일었다. 또한 임기 말 일본인 전범 사면 결정은 반일 감정이 강했던 당시 필리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34][35][36]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엇갈린 평가 속에서 그의 리더십과 정책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5. 1. 긍정적 평가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필리핀은 국제 사회에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49년 9월, 제4차 국제 연합 총회에서는 필리핀 대표 카를로스 P. 로물로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였으며[6], 앵글로색슨 계열 국가들과 스페인어 사용 국가들의 지지를 받아 이루어진 결과였다.[6] 이는 필리핀 국민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6]

1950년 5월에는 키리노 대통령의 초청과 당시 유엔 총회 의장이던 카를로스 P. 로물로의 강력한 제안으로 바기오에서 지역 회의가 열렸다.[6] 이 회의에는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태국, 인도네시아, 호주의 공식 대표들이 참석했다.[6] 대만대한민국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군사 동맹 결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편, 당시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 등 일부 국가는 초청받지 못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요청으로 인해 회의에서는 정치적 문제는 다루어지지 않았고,[6] 대신 경제 및 문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했다. 회의는 참석 국가들이 전 세계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공식 공동 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며 마무리되었다. 이 바기오 회의는 아시아 국가들이 공동의 보호와 지원을 위해 협력하는 미래 동맹의 가능성을 보여준 초기 사례로 평가받는다.[6]

5. 2. 부정적 평가

군중에게 손을 흔드는 키리노


키리노가 속한 자유당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움직임이 일어났다.[6] 아그리피노 에스카레알 하원의원을 중심으로 한 하원 의원 7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족벌주의와 과도한 지출 등 5가지 혐의를 준비했다. 하원의장 에우제니오 페레스는 로렌조 수물롱 하원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7명의 위원회를 임명하여, 탄핵 심판을 담당할 상원에 혐의를 제출하기 전에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법무 차관 펠릭스 안젤로 바우티스타가 키리노 대통령 측 변호인으로 나섰다.[6] 여러 차례의 청문회를 거친 후, 1949년 4월 19일 밤샘 회의 끝에 의회 위원회는 키리노 대통령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현직 대통령이었던 엘피디오 키리노는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1948년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1949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정식 임기를 노렸다.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상원 의원 페르난도 로페즈는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행정부 내 분열에도 불구하고 키리노는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는 필리핀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 부통령, 상원 의원 모두가 같은 정당인 자유당 소속으로 선출된 사례였다. 그러나 이 선거는 폭력과 부정행위가 만연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키리노의 반대자들이 그의 지지자나 경찰에게 구타당하거나 살해되는 사건도 발생하여 부패한 선거로 평가받고 있다.

키리노는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53년 대선에서 호세 율로를 러닝메이트로 삼아 재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라몬 마그사이사이는 장관직을 사임하고 야당인 국민당에 합류했다. 페르난도 로페즈 부통령, 카를로스 로물로 대사, 토마스 카빌리와 후안 수물롱 상원의원 등 다른 주요 자유당 인사들도 키리노에게 등을 돌렸다. 1953년 8월 22일, 국민당과 민주당은 키리노의 패배를 확실히 하기 위해 연합을 결성했다.

키리노는 이른바 '황금 요강 스캔들'에 연루되었고, 정부 개혁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자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부패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청렴 위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페르난도 로페즈 부통령은 이러한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6]

1953년 7월, 필리핀 내에 반일 감정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던 시기에, 키리노는 입원 중이던 미국 볼티모어의 병상에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일본인 전범 105명 전원에 대한 대통령 특별 사면을 발표하고 일본으로의 귀국을 허가했다.[34]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 대해서는 그의 기독교 신앙에 따른 결단이라는 해석[35] 외에도, 전범 수용에 따른 재정적 부담, 또는 일본과의 배상 협상 교착 상태를 타개하려는 정치적 계산 등이 거론된다.[36] 일본 자유민주당 부총재였던 고무라 마사히코는 2016년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필리핀 방문 당시 키리노의 손자로부터, 키리노가 "어머니를 죽인 일본인을 왜 용서하느냐"는 자식의 질문에 "증오의 연쇄를 끊어야 한다"고 답했다는 일화를 들었다고 전했다.[34] 이를 계기로 고무라는 키리노를 기리는 비석 건립을 추진했고, 해당 비석은 일본 히비야 공원에도 세워졌다.

하지만 다카야마 마사유키와 같은 인물은 키리노의 전범 석방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다카야마는 키리노가 대통령 취임 초기 일본인 B·C급 전범 3명을 처형하고, 이후 일본과의 배상 협상에서 법외적인 80억달러를 요구하며 이를 거절당하자 보복성으로 14명을 추가 처형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남은 전범들의 추가 처형을 암시하며 일본 정부를 압박하려 했으나,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의 질책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전범들을 석방했으며, 이것이 훗날 인도주의적인 결정으로 미화되었다는 것이다.[37]

결국 1953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키리노는 건강 문제, 황금 요강 스캔들, 그리고 일본인 전범 석방 결정에 대한 부정적 여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34] 라몬 마그사이사이에게 150만 표라는 큰 차이로 패배했다. 선거 패배 후 키리노는 정계를 은퇴하고 케손 시에서 지내다가 1956년 2월 29일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46년 선거부통령2대자유당52.36%1,161,725표1위
필리핀 부통령 인장 (당선)
1949년 선거대통령6대자유당50.93%1,803,808표1위
필리핀 대통령 기 (당선)
1953년 선거대통령7대자유당31.08%1,313,991표2위낙선



1949년 자유당의 압승 이후, 많은 필리핀인들은 선거 결과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1951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크게 승리하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 1949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페르난도 로페스상원의원 직을 사임하면서 공석이 된 자리에 대한 특별 선거도 치러졌는데, 자유당은 상원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키리노는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53년 대통령 선거에서 호세 율로를 러닝메이트로 내세워 재선을 노렸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라몬 마그사이사이가 장관직을 사임하고 국민당에 합류하는 등 자유당 내 분열이 심화되었다. 페르난도 로페스 부통령, 카를로스 로물로 대사, 토마스 카빌리와 후안 수물롱 상원의원 등 다른 주요 자유당 인사들도 키리노에게 등을 돌렸다.

1953년 8월 22일, 국민당과 민주당은 키리노의 패배를 확실히 하기 위해 연합을 결성했다. 결국 1953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키리노는 약 150만 표 차이로 마그사이사이에게 패배했다. 키리노가 이른바 '황금 요강 스캔들'에 연루된 것 또한 선거 패배의 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7. 기념물

키리노를 기리는 여러 기념물이 있다. 1964년, 일로코스 수르 주의 앙아키 시는 그의 이름을 기려 키리노로 개칭되었다.[30] 1966년에 설립된 키리노 주 역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마닐라의 키리노 애비뉴와 파라냐케의 엘피디오 키리노 애비뉴와 같은 도로들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의 은퇴 저택이 있는 노발리체스-이포 도로는 키리노 하이웨이로 개칭되었다. 마닐라 리잘 공원의 독립 관람대 또한 그의 이름을 기려 키리노 그랜드스탠드로 개칭되었다.

MRT 7호선의 키리노 애비뉴역과 메트로 마닐라 지하철의 키리노 하이웨이역이 운행을 시작하면, 키리노는 LRT 1호선의 키리노역을 포함하여 그의 이름을 딴 세 개의 기차역을 갖게 된다.

2016년, 일본 도쿄히비야 공원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31][32][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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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The Chinese Mestizos and the Formation of the Filipino Nationality https://www.persee.f[...] 1986
[3] 웹사이트 Registros parroquiales, 1713–1994 https://familysearch[...] 1890-11-19
[4] 웹사이트 Third Republic https://www.official[...]
[5] 연설 Inaugural Remarks of President Quirino after the Demise of President Roxas https://www.official[...] Official Gazette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1948-04-17
[6] 서적 The Philippines: Through the Centuries University of Santo Tomas Cooperative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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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Philippine Politics and Society in the Twentieth Century: Colonial Legacies, Post-Colonial Trajectori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5
[9] 서적 The Politics of Elections in Southeast Asia Woodrow Wilson Center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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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웹사이트 Department of Agrarian Reform (DAR) – Organizational Chart http://www.dar.gov.p[...]
[12] 웹사이트 Elpidio Quirino http://philippin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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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웹사이트 A remarkable act of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https://mb.com.ph/20[...] 2023-07-23
[15] 잡지 SEQUELS: Forgiving Neighbor https://content.time[...] 1953-07-27
[16] 웹사이트 Japan commemorates Quirino pardon for over 100 WWII POWs https://www.pna.gov.[...] 2023-07-13
[17] 서적 Philippine Political and Cultural History: the Philippines since British Invasion McCullough Printing Company
[18] 법률 Declaring a Period of National Mourning Over the Death of Former President Elpidio Quirino https://www.official[...] Official Gazette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1956-03-01
[19] 연설 Funeral Oration of President Magsaysay at the Necrological Services for Ex-President Quirino https://www.official[...] Official Gazette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1956-03-05
[20] 웹사이트 Official Month in Review: March 1956 https://www.official[...] Official Gazette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21] 뉴스 Elpidio Quirino reinterred at Libingan ng mga Bayani after 60 years http://www.gmanetwor[...] GMA News 2016-02-26
[22] 뉴스 Bunye: Battles that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 (Epilogue) http://www.sunstar.c[...] 2015-05-24
[23] 뉴스 ABS-CBN's 50th Year Celebrates Philippine Television http://www.newsflash[...] 2003-11-01
[24] 웹사이트 President Elpidio Rivera Quirino https://www.familyse[...]
[25] 웹사이트 Mariano Quirino https://www.familyse[...]
[26] 웹사이트 Juan Manuel Del Rosario https://www.familyse[...]
[27] 웹사이트 Doña Gregoria Quirino https://www.geni.com[...]
[28] 웹사이트 Doña María Rivera (Mendoza) https://www.geni.com[...]
[29] 웹사이트 Toribia Manzano Quebral https://www.geni.com[...]
[30] 법률 An Act Changing the Name of the Municipality of Angaki, Province of Ilocos Sur, to Quirino https://thecorpusjur[...] 1964-06-18
[31] 뉴스 Hibiya Park plaque to honor late Filipino leader Quirino http://www.japantime[...] Japan Times 2016-05-22
[32] 웹사이트 Japan honors former PH president Elpidio Quirino in Hibiya Park http://primer.com.ph[...] Philippine Primer 201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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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간행물 変見自在 2010
[38] 서적 フィリピンと対日戦犯裁判 岩波書店
[39] 웹사이트 Official Month in Review: July 1953 https://www.official[...] フィリピン政府 2022-12-14
[40] 서적 フィリピンと対日戦犯裁判 岩波書店
[41] 서적 サンデルよ、「正義」を教えよう
[42] 간행물 変見自在 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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